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노 유다이(야구선수) (문단 편집) === 프로 입단 전 === 2살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게 되어서 그리 유복하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다. 2살 위의 누나와 어머니의 밑에서 자랐고 스나가와 초등학교 5학년 재학 중에 야구를 시작했다. 6학년때부터 투수를 하기 시작했다고. 한부모 가정이라는 점 때문에 본래는 공립 고등학교로 진학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결국 교토의 야구 강호학교인 교토외국어대부속-니시(京都外大西)고등학교로 진학했다. 2학년 봄부터 벤치에 들어갔고 팀은 제87회 [[일본 고교야구 전국대회]](여름 고시엔)에 진출해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정작 단 한 경기도 던지지 못했다고. 3학년이 되어서는 센바츠(봄 고시엔)에 출전해 고시엔 마운드를 밟았지만 여름 대회 때는 지역예선 준결승에 그쳤다.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붓쿄 대학에 진학해 1학년 봄부터 벤치에 들어갔다. 이 시기에 구속이 상당히 많이 올라갔다고. 그 덕분인지 제구력도 덩달아 개선되며 사사구도 많이 줄였다. 1학년 가을부터 4학년 봄까지 16연승을 내달리는 활약으로 대학야구 3시즌 연속으로 리그 MVP와 베스트 나인을 석권했다. 전국대회에서의 맹활약으로 언론에서는 [[사이토 유키(1988)|사이토 유키]], [[오이시 타츠야(야구선수)|오이시 타츠야]], [[사와무라 히로카즈]]와 함께 '대학야구 BIG 4'로 불리기도 했다. [[2010년]] [[8월]]에 어깨부상을 당하면서 등판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드래프트 회의에서 지명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다행히도 주니치가 1순위로 지명해서 주니치에 입단하였다.[* 이때 당시 드래프트는 최고의 슈퍼스타들이 탄생한 2010 신인드래프트 회의였으며, [[야마다 테츠토]], [[아키야마 쇼고]], [[야나기타 유키]] 등의 쟁쟁한 선수들이 이번 드래프트로 팀이 결정되었다. 당시 4개팀이 손수건왕자 [[사이토 유키(1988)|사이토 유키]], 6개팀이 [[오이시 타츠야(야구선수)|오이시 타츠야]]를 지명하여 무려 10개팀이 둘을 두고 경합을 벌인 반면, [[사와무라 히로카즈]]와 오노만이 각각 요미우리, 주니치의 단독지명을 받게 되었다. 다만, 의외로 이 해 드래프티 중 슈퍼스타들은 대부분 2-3라운드 지명자까지 가서야 나왔고 육성선수 중에서도 [[센가 코다이]]라는 슈퍼스타가 탄생한 반면, 경합이 붙은 1라운더는 2연속 탈락이 나온 뒤에 뽑힌 하즈레 [[야마다 테츠토]]를 제외하고는 모두 망한 이색적인 드래프트이기도 하다.] 등번호는 본인이 동경하고 롤모델로 삼은 [[후지카와 큐지]]의 번호인 22번으로 정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